미국의 새로운 대북접근법과 6자회담


제2호 / 2005-05-31 조성렬


최근 들어 미국의 대외정책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미국정부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제안한 데 이어, 이란 핵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란정부와도 직접대화를 검토하고 있다.
9.11 테러사태 이후 미국은 전쟁을 통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인위적으로 정권교체를 실현시켰다. 하지만 정권교체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비용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었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정권교체’와 ‘핵문제 해결’을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첫 신호탄은 지난 5월 15일에 있었던 미국과 리비아간의 완전한 국교정상화이다. 리비아는 북한, 이란, 이라크, 쿠바, 시리아와 함께 불량국가로 규정됐었지만, 2003년 12월 핵무기 포기선언 이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해 왔다. 이로써 ‘정권교체’ 없이도 핵문제를 해결한 선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9.19 공동성명’ 이후 위폐, 마약, 인권 등 각종 현안들을 제기하면서 체제전환을 시도하던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이 김정일체제를 인정하면서 핵문제를 풀려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이 추진했던 군사외교정책들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방향전환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아닌 ‘관계정상화’로 대북 안전보장 제공

미국은 ‘조건없는 핵포기’를 요구하며 북한을 압박했지만, 제4차 6자회담에서는 ‘핵포기’와 ‘수교’를 연계시키는 구상을 내놓으면서 다소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 핵포기, 후 수교’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동시행동’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은 위폐문제·인권문제를 들어 북한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최근 들어 핵포기 협상과 수교 논의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 미국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북정책의 변화 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 3월 7일 북·미의 뉴욕접촉 때부터이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금융제재문제든 수교문제든 양국 현안을 다룰 북·미 직접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미 의회에서는 짐 리치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아태 소위원회 위원장이 북·미 직접대화, 평화체제, 북·미수교를 제안하고 나섰다.
5월에 들어서자 미국 내 움직임이 빨라졌다. 5월 4일 버시바우 미 대사는 “미국도 남북관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북한에 대한 관점을 바꿀 때가 됐다”고 밝혔다. 곧이어 북핵문제를 논의할 6자회담과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별도포럼’을 ‘병행’하여 개최할 수 있다는 ‘젤리코 보고서’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북·미 수교’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두 가지 면에서 태도변화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선 핵포기, 후 수교’라는 입장에서 ‘핵포기-수교 병행협의’로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미 수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미 의회가 법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핵포기-수교의 법적 보장으로 북한의 불신 해소

모든 현안들이 해결되어야만 북·미 수교가 가능하다고 미국측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미 행정부는 위폐나 인권 문제 등에서 북측이 ‘일정한’ 성의를 보일 경우 먼저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관계개선 조치를 취한 뒤, 북측이 현안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경우에 공식적인 국교수립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 행정부가 북·미 관계의 정상화를 핵포기의 대가로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수교가 이루어지기 위해 미 의회의 동의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은 또다른 걸림돌이었다. 미 의회가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 북·미 수교에 제동을 걸 수가 있기 떄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우려를 해소해 주기 위해 북한의 핵포기와 북·미수교를 연계시키는 법안을 만들려는 미 의회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핵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루거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북한관계법'(가칭)의 입법을 통해 북핵포기와 국교정상화 일정을 법적으로 규정한 ‘북핵 로드맵‘ 초안을 선보였다.
이 법안의 초안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먼저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고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는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북한이 요구해 온 ‘동시행동’과도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측의 약속이행을 미 의회가 사전에 법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불신을 제거해 줄 수 있다.

미국의 정책변화를 북핵문제 해결의 기회로

9.19 공동성명 이후 북한의 경수로 우선제공 요구와 미국의 위폐문제 제기에 걸려 벌써 8개월이 넘게 6자회담이 한발 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북한과 미국 간의 ‘상호불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불신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북한이 가진 대미 불신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다.
미국은 대북 금융제재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델코방코아시아(BDA)은행이 동결한 계좌 50여개 중 1/3은 북한의 불법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금융제재로 묶인 돈이 2,400만 달러이니, 이 가운데 800만 달러 정도는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칙을 깨지 않으면서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명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금융제재의 부분해제에 동의하면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9.19 공동성명’에 따라 관련국들로부터 경수로 제공을 약속받고 즉각 중유를 공급받는 조건으로 영변 원자로를 즉각 동결해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영변 원자로의 가동으로 ‘핵무기고를 늘리는 조치’로 미국을 압박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사용하지 않을 핵무기라면 2개든 20개든 미국으로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원자로 가동으로 북한의 경제적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다고 경수로나 위폐문제와 같은 현안들을 어물쩍 넘기자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핵 제거와 북·미수교라는 ‘출구(exit)'에서 털고가야 할 문제이므로 북한이 경수로 문제를 훗날의 문제로 미루는 데 동의하고, 미국도 위폐문제를 장기과제로 놓고 풀어간다면 ‘로드맵’을 작성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하며

최근 미국은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북·미 직접대화와 ‘별도포럼’이 가시화된다면, 한국정부가 주도하는 남북한 간의 평화체제 구축논의가 예상보다 속도가 붙을 수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 중국간에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물밑접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5월 24~26일간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우다웨이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천영우 한국 외교통상부 평화교섭본부장과 회담을 갖고 6자회담 재개 방안에 관해 협의했다. 백남순 북한외상도 5월 30일부터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 자리가 중국이 미국측 타협안을 북한에게 전달하는 기회가 될지 주목된다.
미국의 성의 있는 조치에 이제 북한이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할 차례이다. 오는 6월 27~30일 김대중 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게 되어 있다. 6년만의 재회가 되는 이 자리에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의 통 큰 결단이 있기를 기대한다.